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심
3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4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_시 144:3 ~ 4
사람이 무엇이고 그 존재 가치가 무엇이며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알려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여쭤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문제를 인간이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인생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에게 가서 물어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큰 소가 작은 소에게 ‘작은 소야, 너는 얼마짜리냐?’
검은 돼지가 흰 돼지에게 ‘요새 돼지 값 좀 올랐다고 하더라. 너는 얼마짜리냐?’ 소나 돼지는 자신들의 값을 모릅니다. 짐승들의 값은 사람이 정합니다.
사람이 잡아먹든지 부려먹든지 사람에게 맡겨져있기 때문에 짐승들의 값은 사람이 정하여 마음대로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값은 어떻습니까? 사람이 정할 수 있습니까?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말처럼 사람 아래에는 짐승이 있고 사람 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사람의 값은 하나님이 정합니다.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려면 하나님께 여쭤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사람을 왜 만드셨습니까?
만드시려면 좋게 만드시든지 왜 이렇게 만들어서 고생을 시키십니까? 왜 이런 복잡한 세상을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면 왜 악한 사람이 득세를 하고 선한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합니까? 왜 진리가 짓밟히고 모순과 부조리가 이 땅에 충만합니까? 어떤 사람은 평생토록 한을 품고 살다가 억울하게 죽어 가는데 왜 이런 모순된 일이 있습니까?’라고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물어 보십시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
시편 73편에도 이런 의문을 가지고 진지하게 하나님께 답을 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왜 악한 자가 잘되고 세력이 강하고 형통하며 자식은 양떼 같고 재산은 날마다 더하며 잘삽니까?’라는 물음에 하나님은 그들은 죽음 후에 파멸에 던져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시편 73:18). “그 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욥기 21:13)는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 멋지게 잘 먹고 잘 살다가도 죽으면 바로 지옥으로 그냥 떨어져 버립니다.
이 세상의 것만 보면 모순투성이입니다. 그래서인지 니이체는 “하나님은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신을 모독하는 것이다. 신이 이런 세상을 만들 리가 없다’고 했다는데 아주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인과응보, 즉 선악에 대한 갚음은 언제 어떻게 있게 되겠습니까? 그 선악에 대한 갚음은 이 땅에서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의 몇 십 년이라는 세월은 영원한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한 순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순과 부조리 등 그 모든 것이 잘못된 것 같지만 하나님은 잠시 후 그 모든 선악에 대한 영원한 심판이 있기 때문에 지금은 그냥 두시는 것입니다.
시편 144편을 기록한 기자는 ‘하나님, 사람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도대체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십니까? 이 죄 많고 천한 보잘 것 없는 인간을 왜 사랑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보잘 것 없고 천한 존재인 자신을 임금 같은 높은 사람이 특별히 사랑해주고 은혜를 베풀면 ‘제가 무엇이관대 저에게 이렇게 은혜를 베푸십니까?’라며 너무나 황송해 하겠지요.
그런데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이은 벌레만도 못하고 먼지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이 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 우주 안에 있는 조그마한 지구에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은 보실 때 어떻겠습니까? 이사야서 40장 15절에는 “그(하나님)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방이 물방울 하나와 같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한 3:16)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개인 개인을 모두 사랑하셔서 그 영혼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는 데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했다는 말씀은 세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저 혼자만 있었어도 아마 예수님이 저를 구원하러 오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나 온 세상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나 동일하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한 사람이 수백 명이나 수천 명이나 수만 명을 똑같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다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나 이 세상에 있는 60억이라는 인구를 사랑하시는 것이나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시 147:4)며 우리의 머리털도 세시는(마태 10:30) 분이시므로 하나님은 알지 못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슨 죄를 지을지, 그 죄로 지옥에 갈 운명에 있다는 것도 아셨기 때문에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자기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도록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태속에 있는 아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어도 부모는 사랑합니다. ‘여보, 우리가 아기를 낳으면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요? 아들이거든 뭐라고 짓고 딸이거든 뭐라고 지읍시다. 나면은 입힐 옷도 만들어 놓고 포대기도 만들어 놓고, 우리 아기 크거든 대학교는 어디로 보낼까요. 우리 아이는 어떻게 키우는 것이 좋겠지요.’ 그 장래까지 다 계획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배속에 있는 아이는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부모는 사랑합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가 많아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보다 더 큽니다. 그토록 사랑하시는 것은 사람 속에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과 목적대로 지음 받은 영혼이 있기 때문이며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자기 자식이 남의 자식보다 잘생기지 못하고 말썽꾸러기라도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병들어 죽으려고 하면 죽을까봐 걱정합니다. 불구인 자식이라도 부모는 사랑하고 불쌍히 여깁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은 그 영혼이 지옥에 가는 것은 원치 않으십니다.
죄는 미워하셔도 사람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헛것 같고 그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나 그 그림자 같은 인생 속에 영혼이 있습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합니다.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이사야 49:5). 내가 나를 봐도 별 것 아니고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 더 별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존귀하게 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그 목적이 우리 각 사람의 영혼에 있다는 것, 하나님이 자기 영혼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스스로 불행해지고 짐승처럼 스스로 천해져서 멸망합니다.
어떤 동네에 다섯살짜리 복남이. 코 줄줄 흐르는 못난이. 동네 아이들에게 자주 맞아 울고다니는 천덕꾸러기. 그런데 자기 집에 가면은 7대 독자입니다. 자기 집에서는 그 집에 대를 이을 사람이니 보배 덩어리입니다. 우리 각자도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는 보배 덩어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