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케 하는 것임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_롬 7:18

성경으로 우리가 확실히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 속에는 선(善)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속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예레미야 17:9) 마음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바울 사도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므로 “(선을 행하기)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일을 행해야 할 줄 알지만, 또한 행하려고 노력도 하지만 할 힘이 없습니다.

악(惡)한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은 악을 행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근본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고 싶어 나쁜 열매를 맺습니까?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는, 나쁜 나무의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고 싶어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쁜 나무나 마찬가지인 이 타락된 죄인에게서 선한 열매를 기대하시겠습니까?  

인간에게 율법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그것을 지킬 수 없음을 처음부터 잘 아셨습니다. 율법을 지키리란 것을 한 사람에게도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모세조차도 사람을 쳐 죽인 살인자입니다. 누가 율법을 지켰습니까?  

그렇다면, 지키지도 못하는 법을 하나님께서는 왜 주셨을까요? 율법을 주신 목적은 다른 데 있습니다.

수십 년 교회당에 다니면서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잘 모르므로 “지키라고 주셨지요. 그러니 지켜야지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지킬 수 있으시던가요?”라고 물으면, “지키려고 노력은 해야지요. 그럼 마음대로 어깁니까?”라고 반문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켜지던가요? 결국 지킬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과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대화하는 가상의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선생님! 잠깐만 실례하겠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선생님, 살인하지 마십시오. 도덕캠페인 나왔습니다.” 라고 했다면, 그 행인이 “아! 그것 십계명에 있는 말씀이지요. 좋은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겠습니까? “너 방금 뭐라고 했냐, 내가 살인범처럼 생겼냐? 네 눈에는 내가 지존파나 막가파로 보이냐?”며 당장 잡아먹을 듯 할 것입니다.  

만일 또 “선생님, 도둑질 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면, “내가 도둑놈인 줄 알아? 도적질하는 것 봤어?” 하며 화를 낼 것입니다. 속으로는 아마 “내가 도둑질 한 것을 이 놈이 어떻게 알까?”하고 뜨끔해 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도적질 하지 마시오’ 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당신, 도둑놈 같이 생겼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 도적질하게 생겼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선생님!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마십시오” 라고 했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속으로는 ‘내가 뒷집 여자 좋아하는 것을 이 놈이 어떻게 알았을까?’ 했을 수도 있겠지요. 또 지나가는 어떤 아가씨에게 “아가씨! 잠깐만 실례하겠습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간음하지 마세요”. 이쯤 되면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격모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그렇게 명령해도 꼼짝 못하는 것이지, 만일 사람이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야단날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너는 살인하게 생겼다’는 말이고,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은 ‘너, 도적질했지? 너, 도둑놈처럼 생겼다’는 말입니다. “탐내지 마!”라는 말은 ‘너, 탐내고 있지?’, “거짓말 하지 마!”라는 말은 ‘너, 거짓말했지?’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는 말은 ‘너, 이웃의 아내, 남의 여자를 좋아하고 있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갈라디아서 3;19). 죄를 지어놓고도 죄인 줄 모르기 때문에 죄를 더 분명히 하기 위해 덧붙여주신 것이 율법이라는 말씀입니다. 범법함을 인해 율법이 더해진 것이므로 율법을 배우게 되면 지은 죄를 더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무엇이 죄인가를 규정하는 법(法)이 없다면, 범죄자를 벌(罰)할 수 없습니다. 죄를 지어도 그 행위가 죄 됨을 규율하는 법이 없으면,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처벌할 수도 없습니다. 법이 나타나면 그것이 비로소 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가 있기 때문에 율법이 있는 것입니다.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 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디모데전서 1:9-10).  

선한 사람에게는 율법이 필요 없습니다.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사람은 죄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대로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니고 죄 있는 사람을 위해 세운 것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_롬 3:19 ~ 20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죄에 따른 율법의 심판인)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로마서 5:12) 이르게 된 것입니다. 모든 죄인은 율법 아래 있으므로, 율법은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죄인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죄인들의 입을 막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도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큰소리칩니다. 사람이 법을 모르면 오히려 담대합니다. 그러나 법을 알게 되면 “아! 그런 법이 있었구나” 하고 입을 다물게 됩니다. 모든 입을 막는다는 말은 ‘죄 없다’는 소리를 못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제 멋대로 운전을 해놓고서, “내 자동차 가지고 내 맘대로 가는데 왜 날 잡느냐? 신호등이 빨간 불이 켜 있든 파란 불이 켜 있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주장할 수 없는데, 운전에는 교통법규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통법규를 어기면, 그 법규를 알았든 알지 못했든 처벌받습니다. 정지해야 할 때는 정지해야 하고, 좌회전 금지 지역에서는 좌회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규정된 법규를 어기고서도 “난 그런 교통법규를 모르는데 왜 날 잡아가느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돈끼리 교도소에서 만났습니다. 두 사돈어른이 교도소에서 만났으니 얼마나 멋쩍었겠습니까. 한 사돈이 다른 사돈에게 물었습니다. “사돈께서는 어떻게 해서 여기 들어오셨소?”. 그러자 질문을 받은 사돈은 “아! 저는 참 억울하게 들어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무슨 죄가 있기에 들어오셨겠지요”. “아∼ 조그만한 죄 하나 있었지요. 어떤 집에서 새끼줄 하나 주운 것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니, 새끼줄 하나 주워 왔는데 여기까지 오셨단 말입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새끼줄 끝에 황소 한 마리가 달려 있었단 말입니다” 그는 황소도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한다는 말이, 황소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새끼줄만 주워왔을 따름인데, 나중에 일고 보니 재수 없게 황소가 따라왔더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돈이 반대로 물었습니다. “그러면, 사돈은 어째서 들어왔습니까?”. “아∼나도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들어 왔지요”. “그래도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오셨겠지요”. “나는 커다란 잠바 하나 입고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을 주섬주섬 옷 안에 주워 넣고 나오면서 ‘이것 외상이오’ 하는 말을 그만 잊고 나왔소”. 그는 슈퍼마켓 물건 도적질하다가 잡혀온 사람입니다. 법이 그 사람 말대로 ‘그렇다’고 인정하겠습니까? ‘외상이라는 말을 깜빡 잊었다’고 재판기록에 죄목을 적겠습니까? 한 사람은 소도둑놈이고, 다른 한 사람은 슈퍼마켓 물건 도둑질한 사람입니다. 법대로 판결 내리면, ‘죄가 없다’고 우겨대지 못합니다. 입을 다물고 판결 내리는 대로 벌 받을 각오를 해야 됩니다.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 없다’는 소리를 못하도록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로마서 3:20).

병원에 가면 약부터 주는 것이 아니라 진찰부터 합니다. 진단을 정확하게 내리고 나서 투약을 하든지, 수술을 받게 하든지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고쳐 주시기 전에 ‘왜 구원을 받아야 되는지’ 우리의 영적 상태를 진찰해 주시며, 그 역할을 맡은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을 배우면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고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알게 되고 구원받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습니까?”라는 의사의 물음에, 병원에 간 환자가 기껏 대답한다는 것이 “내가 아프긴 어디가 아파요. 멀쩡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라고 한다면, 의사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럼 뭐 하러 왔습니까? 가시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뭔가 좀 이상한데 어디가 잘못됐는지 진찰 좀 해 주십시오. 종합검진이라도 받을까요?”라고 해야 합니다.  

그처럼 병이 있는지 없는지 먼저 진찰을 받고 나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지요. 의사가 “아! 진찰을 빨리 받은 것이 참 다행입니다. 암 초기입니다. 빨리 수술 받으면 됩니다” 라는 진단이 내려졌다면, “아, 그렇습니까? 의사선생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언제 수술 받으면 될까요?”하고 대책을 강구할 것입니다. 자기가 병이 있는 줄 알면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어느 부위를 잘라내자고 하면 그것에 동의하고 수술을 받기 위해 벌거벗고 수술대 위에 눕습니다. 그렇게 해야 낫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진단을 내렸는데도 “쓸 데 없는 소리하지 마시오. 내가 왜 병이 있어요. 나는 멀쩡합니다”라고 고집하면, 의사는 그 사람을 고쳐 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진단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얼굴을 새카맣게 되어서 들어왔습니다. 이를 본 엄마가 “얘야, 얼굴에 더러운 것 묻었으니까 얼른 가서 씻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자기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안 묻었는데 왜 그래요. 엄마는 괜히 나만 갖고 귀찮게 하고… 안 씻어요” 라고 대꾸한다면 그럴 때 그 아이로 얼굴을 씻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얘, 가서 얼른 거울을 봐!”.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춰보고서야 “아! 더럽구나” 하면서 스스로 씻습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우리 인간이 어떠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의 기준(基準)에 우리 자신을 비춰봄으로써, 우리 각자는 얼마나 거짓되고 악하며 비참한 상태에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율법 앞에서 더러운 죄를 깨닫고 나서 예수님 앞에 나아가 그 죄를 씻김 받습니다. 거울은 더러운 것을 깨닫게 해 줄 뿐이지 더러운 것을 씻어 주지는 못합니다.

율법 역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 줄 따름이지 죄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를 선하게 해주지도 못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율법은 오직 죄와 그에 따른 심판을 깨닫게 해 줍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는 말씀 속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고, 예수님 앞에 가서 죄 씻음을 받는 것입니다.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_갈 3:24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였는데, 몽학선생(蒙學先生)은 어린애들의 깨우침을 맡은 초보적인 선생을 뜻합니다. 정식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그 전단계의 가르침을 맡았다가 정식 선생에게 인계해 주는 일이 몽학선생의 업무입니다. 그와 같이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서, 그 죄를 씻김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해서 우리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예수님 앞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율법 앞에서 죄를 깨닫고, 예수님 앞에 가서 그 죄를 씻음 받는다는 뜻입니다. 죄와 심판을 깨달음으로써 예수님 앞에 나아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도록 해 주는 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인 성경의 가르침과는 아무 상관없이, 사람들은 오로지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으로 알고 평생 그것들을 지키려고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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