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마음속의 죄를 보심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두 번째 쓰신 글은 무엇일까도 우리는 궁금합니다. 물론 그것도 알 수 없지만, 한번 상상해 볼 수는 있겠습니다. 첫 번째 쓰신 글이 “간음하지 말지니라”였다면, 두 번째 쓰신 글은 아마 앞에서 살펴본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쓰신 말씀을 내려다보았을 것입니다.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는 예수님의 지적은 그들의 마음에 죄를 깨달을 수 있는 빛으로 비추어졌습니다. 비로소 자기들의 죄를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명백한 범죄자요, 마음으로 이미 간음한 자임을 자각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입으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과 원수 된 그들의 죄를 예수님이 지적하신 까닭입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들은 양심의 가책(苛責)을 받았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만 했어도 약간 머뭇거렸을 터인데, ‘너희들도 다 똑같은 죄인이다’는 예수님의 질책이 양심을 때린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다 타락했지만 양심은 선한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양심이 죄를 송사합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언 20:27). 하나님께서는 사람 안에 만들어 두신 영(靈)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고, 영혼은 그 사람의 죄를 하나님께 고소합니다. 자기의 마음은 모를지라도 그 양심은 하나님 앞에 받아야 될 심판이 얼마나 큰지를 압니다.
자기들의 죄는 덮어 놓고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정죄하여 당장이라도 돌로 쳐 죽일 듯 기세등등하던 그들이 자기들의 죄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손에 들었던 그 돌, 예수님이 “쳐 죽이라”고 말씀만 하면 앞 다퉈 그 여자를 치려고 쥐고 있던 돌을 맥없이 떨어뜨렸습니다. 돌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툭, 툭’ 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물러갔습니다. 성경에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어른부터 나가기 시작했을까요?
이 세상 많이 살았다는 경험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에 두 가지 경험이 있다면, 하나는 고생하는 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죄 짓는 경험일 것입니다. 많이 산 사람, 고생 많이 하고 인생을 많이 산 사람은 죄도 그만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른이 죄에 대한 자책감이 더 있을 것입니다. 죄 경험이 많은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다 물러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해 직접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운 분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드러내고, 마지막에 죄인을 심판하실 바로 그분이십니다.
간음죄를 지은 여자를 정죄하던 사람들이 다 물러간 후에야 예수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여자가 그 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여자가 “주여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쓰신 말씀을 내려다보았을 것입니다.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는 예수님의 지적은 그들의 마음에 죄를 깨달을 수 있는 빛으로 비추어졌습니다. 비로소 자기들의 죄를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명백한 범죄자요, 마음으로 이미 간음한 자임을 자각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입으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과 원수 된 그들의 죄를 예수님이 지적하신 까닭입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들은 양심의 가책(苛責)을 받았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만 했어도 약간 머뭇거렸을 터인데, ‘너희들도 다 똑같은 죄인이다’는 예수님의 질책이 양심을 때린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다 타락했지만 양심은 선한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양심이 죄를 송사합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언 20:27). 하나님께서는 사람 안에 만들어 두신 영(靈)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고, 영혼은 그 사람의 죄를 하나님께 고소합니다. 자기의 마음은 모를지라도 그 양심은 하나님 앞에 받아야 될 심판이 얼마나 큰지를 압니다.
자기들의 죄는 덮어 놓고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정죄하여 당장이라도 돌로 쳐 죽일 듯 기세등등하던 그들이 자기들의 죄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손에 들었던 그 돌, 예수님이 “쳐 죽이라”고 말씀만 하면 앞 다퉈 그 여자를 치려고 쥐고 있던 돌을 맥없이 떨어뜨렸습니다. 돌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툭, 툭’ 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물러갔습니다. 성경에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어른부터 나가기 시작했을까요?
이 세상 많이 살았다는 경험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에 두 가지 경험이 있다면, 하나는 고생하는 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죄 짓는 경험일 것입니다. 많이 산 사람, 고생 많이 하고 인생을 많이 산 사람은 죄도 그만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른이 죄에 대한 자책감이 더 있을 것입니다. 죄 경험이 많은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다 물러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해 직접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운 분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드러내고, 마지막에 죄인을 심판하실 바로 그분이십니다.
간음죄를 지은 여자를 정죄하던 사람들이 다 물러간 후에야 예수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여자가 그 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여자가 “주여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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